보야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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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야카 전투는 1819년 8월 7일, 콜롬비아 독립을 위한 결정적인 전투로,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이 호세 마리아 바레이로 장군의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콜롬비아는 독립을 확정하고, 대 콜롬비아 공화국 수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전투는 스페인군을 기습하여 승리했으며, 콜롬비아의 독립 기념일로 지정되어 기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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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야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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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볼리바르의 신(新)그라나다 해방 운동 및 콜롬비아 독립 전쟁 |
날짜 | 1819년 8월 7일 |
장소 | 보야카 |
좌표 | 5°27′00″N 73°25′45″W |
결과 | 애국군의 결정적인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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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교전 1 | 베네수엘라 신 그라나다 영국 군단 |
교전 2 | 스페인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 1 지휘관 | 시몬 볼리바르 호세 안토니오 안소아테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
교전 2 지휘관 | 호세 마리아 바레이로 (포로)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포로) |
병력 규모 | |
교전 1 병력 | 2,850명 보병 2,350명 기병 500명 |
교전 2 병력 | 2,670명 보병 2,300명 기병 350명 포병 20명 대포 3문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 1 피해 | 사망 13명 부상 53명 |
교전 2 피해 | 사망 100명 부상 150명 포로 1,600명 |
2. 독립 이전의 배경
스페인에 침략당한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본토 출신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이는 동족 간의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전투로 번졌다.
이후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나리뇨 등 독립주의자들은 스페인과 투쟁하며 독립을 위한 전투를 시작했다.
2. 1. 코무네로스의 반란 (1781년)
16세기 중기에 스페인에 의해 정복당한 콜롬비아는 식민지 지배 하에 들어갔다. 1717년에는 페루 부왕령에서 분리되어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이 설치되었고, 한때 선주민무이스카족의 수도였던 보고타에 부왕이 배치되었다. 이 부왕령은 재정난으로 인해 한때 폐지되지만, 누에바 그라나다의 민중들은 종주국 스페인의 과중한 세금과 억압에 시달렸다.1781년3월 16일, 소코로 지방(현재의 산탄데르 주)에서 담배세 등의 과중한 세금과 물가 폭등으로 발발한 코무네로스의 반란이 일어나자, 크리오요를 중심으로 하는 코문(혁명 위원회)이 설치되었고, 반란의 요구는 증세 철회에서 독립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부왕 플로레스는 반란의 지도자인 호세 안토니오 갈란을 보고타에서 사형에 처하며 반란을 진압했다.
3. 독립 선언과 내분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이후, 현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이들은 본토 출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는 동족 간의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전투로 이어졌다.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나리뇨 등 독립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스페인과 투쟁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 본국이 프랑스에 침략당하자, 식민지에서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 1810년 7월 20일, 안토니오 나리뇨는 누에바그라나다 부왕을 추방하고 쿤디나마르카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콜롬비아 독립기념일) 독립파는 나리뇨 중심의 보고타 세력(중앙집권주의)과 카밀로 토레스 중심의 카리브해 연안 세력(연방주의)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3. 1. 스페인의 재침과 독립운동의 시련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 본국이 프랑스에 침략당하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지배받는 스페인 정부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는 식민지에서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1810년 7월 20일, 안토니오 나리뇨가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을 추방하고 쿤디나마르카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나리뇨를 중심으로 하는 보고타의 독립파는 중앙 집권을, 카밀로 토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카리브해 연안 지대의 독립파는 연방제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1814년 2월, 스페인 본국에서 페르난도 7세가 즉위하여 절대 왕정이 부활했다. 독립파는 각지에서 패배했고, 보고타 정권은 붕괴되었다. 나리뇨는 체포되어 스페인의 감옥에 투옥되었다.[1]
카르타헤나 공화국 정부는 볼리바르를 독립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쿤디나마르카 탈환을 요청했다. 볼리바르는 그해 말 스페인군과 항복 협정을 체결하고 보고타를 해방시켰지만, 1815년 2월, 페르난도 왕은 파블로 모리요 장군이 이끄는 1만 명의 진압군을 파견했다. 카르타헤나에서 4개월간 격전을 벌였으나 독립파는 패배했고, 볼리바르는 자메이카로 망명했다. 볼리바르는 망명지에서 남아메리카 독립의 대의를 호소하는 "자메이카로부터의 편지"를 썼다.[1]
4. 독립파의 반격과 보야카 전투
1816년 5월, 독립파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보고타가 함락되고, 카밀로 토레스 등 독립파 활동가 다수가 처형되었다. 파블로 모릴로의 철저한 탄압에 대한 반감으로 비독립파 사이에서도 독립의 기운이 높아졌다.
1819년 2월 15일, 앙고스투라에서 독립파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어 단일 국가 수립에 합의했다. 이 회의에서 콜롬비아 공화국 창설과 시몬 볼리바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볼리바르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장군을 카사나레 지방에 파견하여 독립군을 조직하고 콜롬비아 해방을 준비하도록 했다.
4. 1. 안데스 산맥 횡단 작전
1819년 5월 23일, 독립군은 베네수엘라의 세텐타 마을에서 회담을 갖고, 모리요군과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안데스 산맥을 넘어 스페인군의 뒤통수를 치는 기습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독립군은 안데스의 혹독한 추위와 풍우에 시달리며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안데스 횡단에 성공했다. 시몬 볼리바르군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군과 합류하여, 7월 25일 콜롬비아 중부 판타노 데 발가스의 늪에서 스페인군과 조우했다. 볼리바르는 젊은 대령 후안 호세 론돈에게 돌격을 명령했고, 론돈은 불과 14명의 부하를 이끌고 스페인군에게 쇄도하는 결사적인 공격이 효과를 발휘하여, 독립군은 이 전초전에서 신승을 거두었다.[3]
4. 2. 판타노 데 바르가스 전투 (1819년 7월 25일)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은 안데스 산맥을 넘어 보야카 주 지역으로 진입하는 기습 작전을 펼쳤으나, 행군으로 인해 병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의 부왕 후안 데 사마노는 스페인군 사령관 호세 마리아 바레이로에게 볼리바르 군을 저지하고 수도 산타페 진입을 막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1819년 7월 25일 바르가스 늪 전투에서 양측 군대가 충돌했다.[3]볼리바르군은 이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한 후 전장 근처에 진을 쳤고, 스페인군은 인근 파이파에 주둔했다. 양측 모두 수도 산타페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볼리바르는 스페인군을 따돌리고 산타페로 가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고, 이전 상황이 역전되었다.[3]
이 전투에서 볼리바르군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하여 콜롬비아 중부 판타노 데 바르가스 늪에서 스페인군과 조우했다. 볼리바르는 후안 호세 론돈 대령에게 돌격을 명령했고, 론돈은 14명의 부하를 이끌고 스페인군에 쇄도하는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독립군은 이 전초전에서 승리했다.
4. 3. 보야카 전투 (1819년 8월 7일)
1819년 8월 7일, 시몬 볼리바르 장군의 독립군은 보고타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보야카 고원에서 호세 마리아 바레이로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과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독립군은 장비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당시 스페인과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 출신 의용병들도 다수 참가했다.호세 안토니오 안소아테기 장군이 이끄는 산탄데르군 주력 부대가 스페인군 선봉 부대를 공격하여 본대와 분리시켰다. 직후 볼리바르군이 스페인군 후위 부대를 공격했다. 바르셀로나 대대와 파에스 대대가 스페인군 우익을, 영국 대대와 소총 대대가 스페인군 좌익을 공격하여 스페인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바레이로는 선봉 부대와의 합류를 시도했지만, 격렬한 총포화에 단념하고 항복했다.
볼리바르는 패잔병 추격과 소탕을 지시했다.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장군 등 스페인군 고급 장교 다수를 포로로 잡았다. 바레이로는 포로로 잡혀 10월 11일 보고타에서 처형되었다.[9]
이 전투는 낮에 시작되어 불과 3시간 만에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남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독립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전투가 되었다.
5. 전투 이후
1819년 8월 10일, 독립군은 보고타에 입성하여 콜롬비아 독립을 선언했다.[2] 시몬 볼리바르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시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9월 18일, 마요르 광장에서 애국군을 위한 승리 행사가 열렸고, 볼리바르는 도시의 가장 명망 있는 가문의 여성 20명이 하얀 옷을 입고 그에게 수여한 월계관을 받았다. 볼리바르, 산탄데르, 안소아테기는 이 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보야카 십자 훈장''(Cruz de Boyaca)을 수여받았다. 이 승리 행사에는 승리자들을 기리기 위해 많은 수의 무도회와 연회가 열렸고, 볼리바르를 포함한 많은 장교들이 이 축제에 참석했다.
바레이로를 포함한 스페인군 지휘관들은 포로로 잡혔다. 바레이로 대령과 38명은 산탄데르의 명령에 따라 1819년 10월 11일 보고타에서 죽음의 전쟁 포고령에 따라 처형되었다.[4]
5. 1. 콜롬비아의 독립과 그 의의
시몬 볼리바르와 안토니오 나리뇨 등이 주도한 독립 투쟁의 결과, 1819년 8월 7일 벌어진 보야카 전투는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의 왕당파 세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4]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보고타에 입성하여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후안 데 사마노 부왕은 패전 소식을 듣고 카르타헤나로 도주했는데, 이로써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의 통치는 사실상 종식되었다.[2]
이 승리로 대 콜롬비아가 창설(1819년 12월)되었고, 과거 스페인 영토에 자치 정부 수립이 시작되었다. 또한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의 독립과 볼리비아 건국 등 남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8월 7일은 콜롬비아의 공휴일(보야카 전승 기념일)이자 콜롬비아 육군의 날(스페인어: ''Día del Ejército Nacional'')로, 4년마다 콜롬비아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며, 콜롬비아군은 전투 현장에서 대규모 군사 행사를 개최한다.[10]
전투에서 활약한 산탄데르와 안소아테기는 사단장으로 진급했으며, 바레이로를 포함한 스페인 지휘관들과 1,600여 명의 병력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병력 대다수는 애국군에 편입되었고, 바레이로 대령 등 39명은 죽음의 전쟁 포고령에 따라 1819년 10월 11일 보고타에서 처형되었다. 보야카 다리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남아메리카 독립의 상징으로 보존되어 있다.
6. 주요 인물
콜롬비아인 | 베네수엘라인 | 그 외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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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콜롬비아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이후, 현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본토 출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는 동족 간 갈등을 일으켜 결국 전투로 이어졌다.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나리뇨 등 독립주의자들은 스페인에 맞서 독립 투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보야카 전투가 발생했다. 오늘날 8월 7일은 보야카 전투 기념일로, 콜롬비아의 휴일이다.[1]6. 2.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나리뇨 등 독립주의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1] 이 과정에서 베네수엘라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보야카 전투는 이 전쟁의 중요한 부분이었다.[1]6. 3. 기타 인물
콜롬비아인 | 베네수엘라인 | 그 외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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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사건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에 침략당한 이후,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증가했다. 하지만 그들은 본토 출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는 동족 간의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전투로 이어졌다.
이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나리뇨 등 독립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스페인과 투쟁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1] 오늘날 8월 7일은 보야카 전투 기념일로, 콜롬비아의 휴일이다.
8. 관련 장소
오늘날 8월 7일은 보야카 전투 기념일로, 휴일이다.
참조
[1]
웹사이트
La Batalla de Boyacá
https://web.archive.[...]
colombiaaprende.edu.co
2016-09-17
[2]
서적
Bolivar: American liberator
Simon & Schuster
2013
[3]
서적
Simón Bolívar: a life
Yale Univ. Press
2006
[4]
서적
1819: campaña de la Nueva Granada
Universidad Externado de Colombia
2019
[5]
서적
La Batalla de Boyacá en sus testimonios documentales: el bicentenario de la independencia de Colombia 2019 y los retos de la celebración: un cencuentro en torno a las nuevas corrientes historiográficas, Bogotá, D.C., 14 y 15 de junio de 2018
Academia Colombiana de Historia
2018
[6]
서적
La Campaña Libertadora de 1819
Editorial Andes
[7]
서적
La Campaña Libertadora de 1819
Editorial Andes
[8]
웹사이트
The Role of Great Britain in the Independence of Colombia
https://www.cancille[...]
2023-05-08
[9]
서적
Santander
Crítica Colombia
1989
[10]
웹사이트
Efemérides con Inspiración Patriótica
https://www.eltiempo[...]
1999-08-06
[11]
웹사이트
La Batalla de Boyac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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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mbiaaprende.edu.co
2016-09-17
[12]
서적
Bolivar: American liberator
Simon & Schust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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